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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도 부수지 못한 노래 한 곡

기사승인 2020.07.27  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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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대동문화재단 사무처장

“부용산 오리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 사이로/회오리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엔/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나는 이 노래를 2003년 어느 봄날 광주 동구 어느 골목식당 앞 평상에 앉아 처음 들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은 유명한 신문기자 출신의 글쟁이 선배였는데, 술보였고, 그날도 점심을 하면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 뒤였다. 노랫말은 간단하고 2절도 없었다. 선율은 장중했지만 비애감이 서린 곡이었다. 금방 배워 따라 부를 수 있었지만 경박하지 않았다.

이 노랫말을 지은 시인은 박기동(1917~2002), 곡을 붙인 사람은 안성현(1920~2006)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보다는 조희관(1904~1958)이라는 수필가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조희관은 수필가이자 청빈하고 따뜻했던 교육자였다. 지금도 전남 영광읍에는 ‘은행나무집’이라고 불리는 조희관의 생가가 남아 있다. 연희전문, 북경 호스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해방 후에는 광주사범 교사와 목포상고 교감으로 부임했다가 1947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인 목포항도여중에 부임한다. 학교 교훈을 ‘한 송이 들꽃을 보라/남을 시새워하지도 않고/스스로 자랑하지도 아니하며/힘껏 제 빛을 나타내나니’라고 지었다. 순우리말을 사랑해 연구하고 글말로 썼고, 다도해를 ‘섬마니바다’라고 불렀다.

6·25 이후 조희관은 ‘전우’, ‘갈매기’라는 문예지의 주간, 항도출판사 사장으로 일했고, 우리말본 ‘취미의 국어샘’, 수필집 ‘철없는 사람’ 등을 펴냈다. 지금의 목포예총의 전신인 목포문화협회를 1956년 목포의 예술인들과 조직했다. 목포는 해방 이후 남도의 예향으로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탄생했다.

박기동 시인은 1917년에 여수에서 태어나 일본 관서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했고 시를 썼다. 1947년 조희관 교장이 귀국한 그를 항도여중의 국어교사로 초빙한다.

안성현은 1920년 생으로 남평 동사리에서 태어나 남평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었던 아버지 안기옥을 따라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했다. 일본의 동경 도호 음악대학 성악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전남여중, 광주사범학교, 조선대학교 등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48년 작곡집을 발간했는데 이 작곡집에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실려 있다. 어렸을 적 우리가 동요로 부르던 ‘엄마야 누나야’(작곡 김광수) 곡조는 아니다. 조희관 항도여중 교장은 1947년 안성현을 음악교사로 이 학교에 초빙한다. 그렇게 세 사람이 만났다.

1948년 동료 음악교사였던 박기동이 쓴 시에 안성현이 작곡한 노래가 바로 ‘부용산’이다. 이 노랫말은 박기동이 꽃다운 나이에 죽은 여동생을 추모해 쓴 시라고도 한다. 또 안성현은 당시 항도여중의 천재적인 여제자인 김경희가 폐결핵으로 16살에 요절하자 애달파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곡은 조희관 교장이 항도여중생에게 학예회에서 부르게 해서 금세 남도에 유명해졌고,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됐다. 그렇지만 이 곡은 안성현이 월북하고, 그 후로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고 해서 ‘금지곡’ 아닌 ‘금기곡’이 되어 그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불려 전해지는 노래가 되었다.

박기동과, 안성현은 1949년 가을 학교를 떠나게 된다. 박기동 시인은 1957년 목포사범학교를 끝으로 교직을 떠나 서울로, 호주로 옮겨 산다. 안성현 역시 1950년 평양으로 월북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고 1994년이 됐다. 당시 광주일보 ‘예향’ 월간 부장이었던 한송주는 ‘조희관 문학상’ 시상식장에 취재를 갔다가 이 곡을 듣게 됐고, 글을 써서 ‘노래와 함께 역사와 함께’라는 책에 발표했다. 앞서 말한 그 기자가 바로 이 이다.

호주로 이민 가 있던 박기동은 2002년 일시 귀국해 산문집 ‘부용산’을 출판했다. 이후 2004년 호주에서 영구 귀국해 2005년 서울에서 생을 마쳤다. 안성현은 86세인 2006년 4월 북한에서 눈을 감았다. 수필가 조희관은 1958년 9월 목포 유달산 발치 서산동 판자촌에서 운명했다.

여러 가수들이 ‘부활한’ 부용산 노래를 불렀는데 대표적으로 안치환, 한영애, 이동원의 버전이 유명하다. 1999년 벌교 부용산에, 2002년에 목포여자고등학교에 부용산 노래비가, 2009년에 남평 드들강변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세워졌다. 올해는 안성현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나주에서 기념사업을 개최하기로 했고, ‘부용산’의 이야기도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가곡 ‘부용산’은 근현대사의 아픔과 설움, 남도민의 애환과 정서를 담고 있는 명곡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 군사 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넘어 자유 평화의 시대로 진입한 우리가 기억해야할 남도의 문화 콘텐츠다. 그 따뜻하고 뜻 높았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가고, 부용산 위의 하늘은 오늘도 눈물 나게 푸르고 푸르기만 하다.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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