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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출신 독립운동가 김철

기사승인 2019.10.29  10: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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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 신광면에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배우다

김철은 1886년 10월15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4남 1녀 중 3남으로 어렸을적 이름은 김영탁 이었다고 한다. 천석 이상의 부자집 으로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마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하였으나 조국은 일본에 합병돠어 장래가 불투명하자 2년뒤 중국 상해로 망명을 결행했다. 1918년 8월에 여운형,장덕수,조동호,선우혁,한진교와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설했고 기관지‘신한청년’을 발간했으며 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했다.

정당을 결성하자마자 일본의 침략과 부당한 식민지화를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일이었고 1차 세계 대전이 끝나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있음을 알고 대표를 파견하였다. 대표로는 영어 구사를 잘하는 김규식이 선정되었고 필요한 자금조달은 동지들이 만주 와 러시아 ,일본,국내로 잠입해 모금 운동을 해서 1만원을 마련 상해로 가져가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하였다. 1919년3월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이동녕,이시영,조완구,신익희,신석우,조동호,신규식,선우혁,한진교 등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프랑스 조계내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4월 상해에서 1차로 제헌의원격인 의정원이 각계대표로 29명으로 구성돠었다. 젊은 김철도 의정원 대표로 선임됐고 갈은달 제 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에 임명됐으며 1920년 1월에는 김구 등과 같이 의용단을 발기해 돌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의용단 산하 선진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 업무에 종사했다.

또 1932년 1월8일 이봉창의 일왕 저격사건과 4월29일 한인애국당의 일원인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천장절 기념식장에 들어가 단상에 있는 일본군 히라카와 대장을 비롯하여 요인들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 김구와 같이 주도했다. 같은해 5월10일 상해임시정부를 항주로 이동해 자신의 숙소인 항주시 소재 청태 제2여사 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를 설치 했다. 5월16일 항주에서 첫 국무회의에서 김철은 재무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년 뒤애 항주소재 광자병원애서 격무에 시달리다 급성페렴으로 순국했다.

선생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며 항저우 악비묘의 뒷산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현재 이곳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묘고의 위치조차 알 수 없어 운명한지 60년만에 후손들에 의해 한줌의 흙만 옮겨져 숭모비 아래 안장되었고 선생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75년 8월 고향에다 숭모비를 세워 선생의 뜻을 기리다가 2003년 기념관을 준공하여 역사의 길잡이로 활용하고 있다.

김낙현 기자 nak1090@naver.com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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