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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때 ‘주먹밥과 피’를 나누며 계엄군에 맞선 여인들

기사승인 2019.05.15  17: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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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양동·대인시장 ‘아짐들'과 ‘황금동의 여인들’이 실천한 대동세상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아짐들'이 시민군들과 함께 나누었던 주먹밥은 단순한 밥이 아니었다 ⓒ 5.18 기념재단

“5·18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광주시내 대다수 시민들의‘시민정신’은 살아있었다. 계엄군의 진입 등 유례없는 혼란이 빚어졌던 지난 10일 동안 광주시는 치안 부재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광주의 내일을 걱정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모자라는 물건들을 서로 나눠 쓰고 간첩을 잡아 당국에 인계했으며 부상자를 위해 헌혈에 앞장서고 상가에서는 외상으로 생필품을 주는 등 곳곳에서 미덕을 꽃피웠다···”

1980년 5월 30일 자 중앙일보의 기사 내용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 그랬다. 당시 신군부는 광주를 ‘무장 폭도’들이 점거한 무정부 상태의 ‘무법천지’로 보고 강경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생필품 공급이 차단되고 교통과 통신이 두절된 고립된 섬에 갇힌 시민들은 분연히 일어나 항쟁에 참여하였고, 자율적으로 자체 경비단을 조직하여 질서를 유지하였다.

항쟁 기간 중에 광주에서는 강도·강탈 등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은행, 새마을금고 등 모든 금융기관은 무사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놀라운 시민정신을 발휘했으며, 모두가 더불어 사는 ‘대동(大同) 세상’를 이루어 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음과 두려움을 넘어 낮은 곳에서 밥을 나누고 피를 나누며 ‘광주정신’을 실천했다.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주먹밥을 만들고 있는 ‘대인시장의 아짐들’ ⓒ 5.18 기념재단

두 주먹 불끈 쥐고 주먹밥 나눈 ‘양동과 대인시장의 아짐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월! 그날의 ‘주먹밥’에는 ‘오월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이야말로 우리의 자존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의 참모습입니다···”

광주시민들은 2년 전 5·18 37주년 기념식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곡비(哭婢)의 울음소리 같았던 대통령의 서사는 많은 시민들을 울렸다.

대통령의 기념사를 떠나서 ‘주먹밥과 피’는 80년 광주를 하나로 이어주는 연대의 매개물이자 나눔 공동체의 상징이며 숭고한 ‘오월정신’의 표상이다.

2017년 여름에 개봉되어 1200만 관객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던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80년 5월 그날, 광주에 왔다가 서울로 돌아가던 만섭(송강호 분)이 ‘주먹밥’을 상기하며, 택시를 돌려 다시 광주로 돌아오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80년 5월 광주는 고립된 섬이었다. 철도, 하늘, 도로 등 모든 교통과 통신 수단이 끊어지고 물자공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공수부대와 대치한 시민군들의 먹는 문제는 심각했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몸빼 아짐’들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섰다. 행여 내 자식들 굶을세라 어머니의 마음으로 시장의 공터에 솥단지를 걸고 십시일반 쌀을 모아 주먹밥과 음료수 등 먹을 것을 만들어 날랐다. 자발적으로 조를 편성해서 ‘죽을 각오’로 밥을 하고 하루 종일 주먹밥을 만들었다.

광주 양동 시장 상인들이 시민군들을 위한 밥을 짓고 있다. 양동시장은 5·18 민중항쟁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고 사적비가 세워졌다. ⓒ 5.18 기념재단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이 시민군들과 함께 나누었던 주먹밥은 단순한 밥이 아니었다. ‘광주 민중항쟁의 원동력’이었고 또 다른 한 축이었다. ‘나눔과 대동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훗날,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양동과 대인시장 상인들에게 ‘오월어머니상’이 주어졌으며, 양동시장은 5·18 민중항쟁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고 입구에 사적비가 세워졌다.

헌혈을 위해 병원에 몰려든 시민들과 의료진 ⓒ 5.18 기념재단

두 팔 걷어붙이고 피를 나눈 ‘황금동의 여인들’

80년 5월 광주에는 부족한 물자 속에서도 풍족했던 주먹밥처럼 넘쳐 나는 게 또 하나 있었다.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폭행과 5월 21일 집단 발포 후 광주시내 병원에는 총상을 입은 부상자들이 밀려들었다. 이들에게 수혈할 피와 수액이 턱없이 부족했다.

계엄군들에 의해 교통이 마비된 상태라서 외부로부터의 혈액 조달은 불가능했다. 긴박한 상황이 시민들에게 곧바로 알려졌다.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이 나서자 순식간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헌혈을 하겠다고 몰려들었다. 피가 넘쳐 났다.

그중에는 널리 알려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8살 박금희 열사가 있었다. 박금희 열사는 피가 모자라다는 방송차량의 호소를 듣고 광주기독병원으로 달려가 헌혈을 하고 집으로 가던 중 계엄군의 총탄에 맞고 쓰러져 다시 기독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광주기독병원에서는 ‘금희의 오월을 기억하는 빚진 자들의 생명 나눔’이라는 주제로 헌혈 캠페인을 벌이며 박열사를 추모하고 있다.

5.18 국립묘지에 있는 무명열사의 묘. 적십자 병원으로 달려가 기꺼이 두 팔 걷어붙이고 피를 나눈 ‘황금동의 여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광주정신’을 실천한 무명의 열사들이었다 ⓒ 광주광역시 교욱청

80년 5월 광주에서 피를 나눈 사람들 중에는 성도 이름도 모르는 ‘무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이른바 ‘화려한 휴가’를 나온 계엄군들의 학살이 자행됐던 옛 전남도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온 ‘황금동의 여인들’이었다.

황금동에는 그 이름과는 달리 밤이면 붉은 홍등 아래서 술과 웃음을 파는, 상처 입은 여인들이 모여 사는 광주의 대표적인 유흥가가 있었다. 항쟁 당시 인근에 있는 적십자 병원에서 죽어가는 시민들과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목격한 그녀들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계엄군들에게 쫓기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숨겨 주기도 했고, 단체로 헌혈에 나섰다. “몸은 더럽혀졌으나, 피는 깨끗하다”라며 인근에 있는 적십자 병원으로 달려가 기꺼이 두 팔 걷어붙이고 피를 나눈 ‘황금동의 여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광주정신’을 실천한 무명의 열사들이었다.

5·18 국립묘지 앞에서 더불어 사는 대동세상을 염원하는 ‘대동세상군상’ ⓒ 5.18 기념재단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항쟁군상’ ⓒ 5.18 기념재단

일부 극우 보수단체들의 폄훼와 왜곡 속에 서른아홉 번째 광주의 5월이 지나고 있다. 39년 전, 망월동에 누워있는 열사들이 목숨 바쳐가며 지키고자 했던 ‘광주의 정신과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불의한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과 모두가 더불어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대동세상’이었을 것이다.

5·18 국립묘지 앞에 ‘대동세상군상’과 ‘무장항쟁군상’이 양옆으로 나란히 서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주먹밥을 나눈 ‘양동과 대인시장의 아짐들’과 두 팔 걷어붙이고 피를 나눴던, 이름도 성도 없는 ‘황금동의 여인들’이야말로 ‘광주의 정신과 가치’의 상징이다.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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