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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가을이··· 은빛 억새 일렁이는 무등산

기사승인 2018.09.11  12: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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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속은 지금 ‘임무 교대 중’

무등산 중머리재 억새꽃이 피어났다

달력 한 장 넘겼을 뿐인데 풍경이 확 바뀌었다. 언제 여름이었고, 언제 그렇게 더웠냐는 듯이 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선선해졌다. 낮동안의 햇살도 습기가 빠진 탓에 꿉꿉하지 않고 적당히 기분 좋은 감촉으로 얼굴을 스친다.

들판의 벼논은 초록에서 연노란색으로 물들어가며 올해도 풍년을 예고하고 있다. 붉디붉었던 백일홍 꽃나무도 강렬했던 ‘붉음’을 점차 퇴색시키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고 있는 숲 속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가까운 무등산으로 향한다.

새인봉 가는길. 양옆으로 빽빽이 하늘을 가렸던 나무의 잎새들은 성글어졌고 점차 색이 바래가고 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무등산의 관문, 증심사 버스 종점에 도착하자 선선해진 날씨 탓에 산행객들이 부쩍 늘었다. 종점에 모였던 많은 산객들이 순식간에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무등산에는 거미줄만큼이나 많은 산행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언제나 선택의 순간은 다가온다. 숲 속의 노란 두 갈래 길에서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훗날 깊은 한숨을 쉬며 후회한 영국의 서정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택하지 않는 길’을 상기하며,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해 본다. 시인의 말대로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음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있는 새인봉으로 길을 잡는다. 쓰람 쓰람 쓰르람... 숲에 들어서자 여름 동안 목청을 높였던 매미들의 데시벨은 뚝 떨어졌고, 귀뚜루 뀌뚜루 똘똘똘... 귀뚜라미와 여치들의 옥타브는 한층 높아졌다. 숲 속은 지금 한창 ‘임무 교대’ 중이다

하얀 솜털 같은 꽃을 피웠던 나무도 벌써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돌계단과 대숲을 지나고 나니 노란 멍석이 깔린 편안한 숲길이 나온다. 위대했던 지난여름, 길 양옆으로 빽빽이 하늘을 가렸던 나무의 잎새들은 성글어졌고 점차 색이 바래가고 있다. 하얀 솜털 같은 꽃을 피웠던 피나무도 벌써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가을날’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함께 주여!라는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온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 중에서)

무등산 새인봉,  봉우리들이 멀리서 보면 마치 임금님의 옥새와 같다 하여 새인봉은(璽印峯) 또는 인괘봉(印掛峯)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광주광역시의 모습이 보인다

약 1시간 정도 오르니 우뚝 솟아있는 두 개의 봉우리가 나온다. 남동쪽의 투구봉과 맞은편의 선두암(船頭岩)이다. 선두암은 그 모습이 뱃머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봉우리들이 멀리서 보면 마치 임금님의 옥새와 같다 하여 새인봉은(璽印峯) 또는 인괘봉(印掛峯)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칼로 자른듯한 직각의 절벽이 있어 암벽등반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새인봉 선두암, 그 모습이 뱃머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인봉 정상에 오르니 광주광역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층 높아진 청명한 가을 하늘 덕에 멀리 화순의 모후산, 영암의 월출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절벽 밑으로는 아스라이 천년고찰, 증심사와 약사사가 조감도처럼 보인다. 까마득히 들려오는 청고한 스님의 독경소리를 멀리 한채 잠시 내리막을 거쳐 새인봉 사거리 쉼터에 도착한다.

절벽 밑으로는 아스라이 천년고찰, 약사사가 조감도처럼 보인다

서방님, 저 억울해요

산도 인생도 내려왔으면 올라가야 하는 법. 이제부터는 급경사 오르막 길이다. 다음 목적지 중머리재까지 약 1시간 남짓 계속 올라 서야 한다. 오르막이지만 중간중간 한 몸에서 여러 줄기가 뻗은 희귀한 낙락장송과 돌무덤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있는 길이다.

데크길과 돌계단을 연속해 오른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며 헐떡 거린다. 산아래 도심에서 먹고살기 위해 내뿜던 ‘노동의 헐떡거림’과는 차원이 다른 헐떡임이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도 중 길옆 바위 밑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연분홍의 가냘픈 꽃과 조우한다.

길옆 바위 밑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연분홍의 가냘픈 꽃. 며느리 밥풀꽃이다
붉은 꽃에 흰 밥알 두 개를 물고 있는 '며느리 밥풀꽃'

네 이름이 모니?  스마트폰에게 물어본다. ‘며느리 밥풀꽃’이란다. 아, 또 ‘슬픈 이야기’가 있겠구나.

옛날 가난한 집에서 살던 아가씨가 몰락한 양반집으로 시집와 독살스런 시어머니 밑에서 모진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밥을 짓다 뜸이 잘 들었는지 살펴보느라 밥 알 두 개를 입에 넣었다.

하필 그때 시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오다가 이 모습을 보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어른들께 먼저 드릴 생각은 않고 밥을 훔쳐 먹는다고 장작으로 모진 매를 때렸다. 며느리는 매를 맞으면서, “밥을 먹은 게 아니라 뜸이 잘 들었는지 보느라 밥알 두 개를 입에 넣은 거예요.” 하며 혀를 내밀어 보이며 죽고 말았다.

그 며느리가 죽어서 묻힌 산속 무덤가에 붉은 꽃에 흰 밥알 두 개를 문 꽃이 피어났다. ‘며느리 밥풀꽃’이다.

무등산의 중심 허브 역할을 하는 중머리재

은빛 억새 일렁이는 중머리재

“서방님들, 저희가 먹은 것은 이 밥풀 두 개뿐이어요. 너무 억울해요···” 불쌍한 며느리들의 탄원을 애써 외면 한채 오르다 보니 어느덧 숲 속을 벗어나면서 하늘이 열린다. 시야가 확 트이며 민둥 한 개활지가 나온다. 오늘의 목적지, 중머리재다.

중머리재는 바람 때문에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아 마치 스님의 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무등산의 중심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식생 복원 사업을 이유로 너무 많은 인공물들이 설치되어 오히려 주변 경관을 해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억새꽃은 보는 방향에 따라 그 색깔을 달리 한다
억새는 일부 지방에서‘으악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 노래에 나오는 그 으악새가 억새꽃이다

그럼에도 중머리재의 가을 풍경은 압권이다. ‘봄은 땅으로부터 올라오고, 가을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다. 하늘에 더 가까운 중머리재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다. 가을의 전령사, 은빛 억새들이 일렁인다.  은빛 물결은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닌 듯싶다.

억새꽃은 보는 방향에 따라 그 색깔을 달리 한다.  햇빛을 받는 한낮에 볼 때는 은빛으로 일렁이지만, 황혼 무렵 햇빛을 등 지고 볼 때는 황금물결을 이룬다.

중머리재에서 바라보는 광주광역시의 모습은 꽤나 관념적이다

억새는 일부 지방에서 ‘으악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 노래에 나오는 그 으악새가 억새꽃이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

중머리재 으악새가 하늘하늘 가느다란 허리를 낭창 거리며 어서 오라고 유혹하는 가을이다.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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