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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는 절의를, 임금과는 의리를

기사승인 2018.01.15  19: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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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나들이 – 옥천조씨 절민공파 종가

그 여름날의 무더위는 언제였던가. 가을하늘은 제법 높은데 낮의 기온은 뜨겁고 밤에는 찬바람이 분다. 들녘의 풍경도 이제 황금벌판으로 변해가고 과실나무엔 저마다의 과실이 열려 풍요로움을 더한다. 그 해 가뭄은 모두 잊은 듯 하다.

옥천조씨 절민공파 종가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주암휴게소에 잠시 머물며 숨을 돌려본다. 주암 톨게이틀를 지나 오른쪽으로 향하면 국도 22호선이 주암천변으로 이어진다. 주암초등학교에 이르기 전 오른쪽으로 주암천을 따라 마을길로 접어들면 야트막한 산 아래 구산마을이 있다. 마을의 왼쪽으로는 보성강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주암천(겸천)이 흘러가는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순천 주암은 백제 때 둔지현, 신라때 가음현, 부유현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시 순천군 주암면 산산리, 구산리, 금곡리를 하나로 묶어 순천군 주암면 구산리라 했다. 구산리를 구성하는 자연마을로는 산산, 금곡, 구산마을이 있다. 산산(蒜山)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에 순천도호부 주암면 상도 산산여(蒜山閭),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순천군 주암면 산산리로 기록되어 있다. 본디 마늘 모양으로 생긴 마늘산(말메)의 이름을 취해 산산리라 했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직후 경주정씨가 터를 일구어 살았다. 현재는 선산이라 부른다.

구산(九山)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에 순천도호부 주암면 하도 구산리(龜山里),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순천군 주암면 구산리(九山里)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 형국이 거북이 형국이라 하여 거북메라 부르고 구산(龜山)이라 한 것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구산리(九山里)로 기록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옥천조씨 조유가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마을 부근에 은거하면서 조씨 일문의 터가 되었다. 금곡(金谷)마을은 본디 쇳골이라 부른다. 1789년 호구총수에 순천도호부 주암면 금곡,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순천군 주암면 금곡리로 기록되어 있다.

옥천조씨 절민공파 종가

고려에 대한 절의와 단종을 향한 의리

옥천조씨 부정공 건곡 조유(趙瑜.1346∼1428)는 고려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은둔하니 곧 현재의 주암면 죽천리였다. 당시 이곳은 겸천이라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문동 72현이라 불리는 그에게 두 아들이 있어 장자는 참의공 삼성 조사문(趙斯文.1398∼1483)이고 차자는 세종대 무과 급제후 병마절도사에 이른 절민공 죽촌 조숭문(趙崇文.?∼1456)이다.

1456년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성삼문의 고모부 되는 조숭문과 그 아들 교관공 구천 조철산(趙哲山.?∼1456)은 처형되고 말았다. 이들은 훗날 신원이 복원되면서 1711년 겸천사(주벽 부정공 조유, 절민공 조숭문, 교관공 조철산, 문민공 박중림, 충익공 김종서, 충정공 박팽년 배향. 참의공 조사문 추배)에 제향되고 1791년 장릉 별단에 배향되었다.

조숭문에게는 1844년(도광14년) 2월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가선대부 함길북도병마절도사 조숭문 증시 절민공자’ 증시 교지가 내려졌고 이에 앞서 조철산에게는 1799년 9월 4일 ‘학생 조철산 증동몽교관 조봉대부자’ 증직 교지가 내려졌다. 절민공파 6세인 조종원(趙宗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의진에 합류하여 금산전투에서 순절함으로써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옥천조씨 절민공파 종가

겸인오덕과 충효

절민공파의 가훈으로는 겸인오덕(謙忍悟德)으로 축약된다.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참고 인내하며, 믄제가 있다면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며, 덕으로 사람들을 품으라는 말이다. 파조로부터 5세 되는 둔은(遯隱) 조개(趙愷.1511∼?)는 특히 충효(忠孝)를 강조하며 이르기를 ‘두 글자가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대대로의 교훈이니 너희들은 힘쓰고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실천한 이가 바로 그 아들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출전해 순절한 조종원이다.

8세되는 조윤찬에게는 아들 5형제가 있다. 지형, 하형, 필형, 제형, 치형이 그들이다. 이중 막내되는 치형의 후손이자 10세 조세행의 차자인 구호 조동창(趙東昌.1688∼1755)의 후손이 봉사손으로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12세 조현귀(趙顯龜.1733∼1760)의 처 목천장씨는 효열부로 이름을 남겼고 13세 무본재(務本齋) 조기신(趙基信.1760∼1818)과 14세 계자 담헌(湛軒) 조진용(趙鎭龍.1803∼1860)은 효자로 이름났다고 한다. 조진용은 담락재(湛樂齋)를 지어 형제들과 우애를 돈독히 하기도 했다.

현 종손의 증조부이자 16세 귀정(龜亭) 조병두(趙秉斗.1847∼1930)는 궁색해져 가는 가문을 일으킬 생각을 가졌고 봉사와 돈목을 하며 손님접대에 있어서 선대의 규모를 따라 행했다고 하는데, 사랑채에 큰 구휼간을 두고 종가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하룻밤 식사와 잠자리, 노잣돈을 제공하는 등 덕을 베풀고 살았다고 한다. 증조모 또한 대문밖에 징을 마련해 두고 가난한 이웃들이 징을 치고 바가지를 들고 오면 쌀을 담아 주기도 했다 한다.

서원내 제사공간인 겸천사

종택 15채 중 8채 건물 보존

종손의 이야기로는 사명대사(1544∼1610)가 집터를 점지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집을 처음 지을 때는 숙종(1675∼1720) 때라고 한다. 그리고 문화재 안내판에는 조치정(趙致亭)이 숙종2년(1676)에 건립하였다고 적어놓고 있다. 족보를 열어보니 조치정은 조치형(趙致亨.1642∼1754)의 오자(誤字)였다.

현재 종택은 안대문, 안주인들이 기거하던 안채, 할아버지가 기거하던 사랑채, 문간채, 지하저장 시설이 있었던 곳집(곳간채), 4대 봉사하는 사당, 서당 훈장을 모셔놓고 공부하던 책방, 아래채, 중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 1935년에 새로 판 우물이 안채 앞에 있다. 본래 모과나무 부근에 우물이 있었는데 당나귀가 빠져 죽는 바람에 매립하고 현재의 자리에 다시 팠다고 한다.

16세 귀정 조병두가 거처했다는 바깥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사랑채는 귀호정사(龜湖精舍)라 부른다. 조병두가 거북이 머리에 1875년(을해)에 건립한 귀두정(龜頭亭) 정자도 온데간데없고 정자 잃은 원운 현판만 종가에 남아 있다.

종택 마당에는 감나무는 물론 수령 300년된 모과나무를 비롯해 밤나무, 무화과, 석류나무, 동백나무, 철쭉, 후박나무, 가시오가피나무가 있고 집 뒤편으로는 대나무와 녹차나무가 공간을 메우고 있다. 예전에는 모두 귀히 쓰던 과일들과 차나무였으리라. 종택은 1990년 2월 24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8호 순천 조승훈 가옥으로 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종택은 옛 영화를 잃어가는데

종손 조승훈(70)님은 1972년 농협 공채에 합격한 후 일평생 농협맨으로 살았다. 그동안 농협에서 전무, 상무, 상임이사로 근무할 때는 곡성, 고흥, 순천 등지에서 근무했고 순천농협 주암지점장을 마지막으로 2004년 무렵 퇴직했다. 순천과 가까운 광양 봉강면 지곡리에서 시집온 광양댁 파평 윤옥희(69)님은 종손과 23세에 혼인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자식농사 잘 지었다 하는 말을 들으며 다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종택은 주인과 늘 함께 하기를 원하는데 주인은 날마다 이곳에 머물지 못하니 그것이 아쉬움이라. 서로의 바쁜 삶속에 자녀들은 둥지를 떠나고 돌아올 줄 모른다. 종택 앞에 세워진 안내판이 수정되기를 바라며 바쁜 걸음 옮겨본다.

대동문화 103호(2017. 11-12월)

최성은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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