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옛 남광주역 멀구슬나무 그늘 아래서

기사승인 2022.08.22  14:45:23

공유
default_news_ad1

-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미디어본부장

[문화산책] 광주 동구 학동 남광주시장 주차장과 푸른길이 만나는 지점에 멀구슬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아랫동아리에서 재면 한 아름 정도 둘레가 되고 멀리서 목측으로 가늠해도 키는 15미터를 넘는 것 같다.
멀구슬나무는 남부 수종으로 고목을 만나기가 그닥 쉽지 않다. 전북 고창군의 200여 년 된 멀구슬나무가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해남, 완도, 제주도 등에서 자라는 이 나무의 학명은 ‘귀한 나무’라는 말뜻을 가지고 있다.
남광주역사가 만들어졌던 1930년대 이후 심어진 나무로 추정이 되고, 그렇다면 수령 100년이 안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귀한 나무’의 가치가 왜소해지는 것은 아니다.
해마다 5월이면 이 나무는 새 가지 끝에 향기로운 자줏빛 꽃을 피워낸다. 9월에 노란색 열매가 익고, 이듬해 봄까지 달려있어 주린 겨울 텃새들의 먹이가 된다. 독성 강한 씨는 천연살충제의 재료로 쓰이고, 피부병 치료나 치매 예방 약제로도 유용하다.
이 나무는 남광주역과 시장, 전남대학교병원과 광주천, 그리고 자기 나이만큼의 광주 역사를 지켜보면서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아마 이 나무에게 가장 극적인 순간은 5·18과 푸른길의 역사였을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을 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던 의료인들의 헌신이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있었다. 자발적인 시민들의 부상자 후송과 헌혈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목숨을 건 시민들의 생명 연대를 멀구슬나무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2000년 8월 경전선 이설로 남광주역에서 효천역까지 철도 폐선부지가 생겨났다. 시민들은 경전철 부지로 활용될 예정이었던 부지를 시민 공간으로 활용하자고 결의했다.
1998년부터 푸른길 조성을 위한 시민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2000년 드디어 ‘푸른길’ 조성 사업이 결정됐고 철도 폐선 부지가 지금의 시민 숲과 산책길로 탈바꿈되었다. 아마 이런 시민적 힘과 지혜가 아니었으면, 이 멀구슬나무는 그때 무참하게 베어졌을지도 모른다.
푸른길 공원은 시민 참여 설계, 시민 참여의 숲 조성 등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남도 곳곳에서 이식된 70여 수목들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구실잣밤나무, 때죽나무, 석류나무, 동백나무, 피라칸사스 등의 수목들과 야생화들이 시민들의 산책길에 함께하고 있다.
얼마나 이 푸른길 공원 사업이 잘 결정된 일이냐 하는 것을 보려거든 직접 이 길을 걸어보면 알 수 있다. 걸으며 쉬면서 시민들은 이 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길은 길을 이어주고 장소는 길을 따라 새로운 장소와 만난다. 동네와 동네가 서로 소통하고 동네의 이야기가 넘나들면서, 길이 매력적인 거점들을 서로 조명해준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도, 동명동 젊음의 거리도, 양림 역사문화마을도, 광주역과 백운광장 도시재생도 그 배경에는 푸른길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역~남광주역~백운광장~광주대학교 구간의 이 문화와 생태 핏줄 때문에 매력적인 광주 관광 거점들이 연결됐다.
도시 계획과 재생, 문화관광 정책은 개발 위주의 자본 논리로 성공 모델을 만들 수 없다. 도시의 긴 생명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삶의 숨결을 이어붙일 수 있는 정책적 안목과 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멀구슬나무는 남광주역사의 소멸도 지켜봤을 것이다. 남광주역은 2000년 8월 경전선이 광주의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폐역됐다. 화순, 보성, 장흥, 벌교, 고흥, 여수 등에서 장꾼들이 보따리를 이고지고 와서 ‘도깨비시장’으로 불렸던 남광주시장에서 팔아 돈을 장만했다. 그 돈으로 자식들을 교육하고 생계를 이었다.
매일 남도의 채소와 생선과 곡물들이 여기에 모여 광주시민들의 아침 밥상 위에 올랐다. 그런 시간들이 흘러서 우리들 삶의 빛이 채워지고 우리 삶의 DNA에 남을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밥과 생명이 이어지는 역과 시장이었다.
이 나무는 남광주역사가 사라진 실패담도 남광주 밤기차 야시장이 의욕적으로 출발했다가 결국 보조금이 중단되자 문을 닫았던 것도 기억할 것이다.
지금 이 보호수급 멀구슬나무는 덩굴식물들이 휘어져 감아 올라가서 가지들이 말라가고, 생활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 있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방치된 채 자라고 있다. 광주 지하철 2호선 남광주역 공사로 주변이 어수선한 가운데도 푸른 열매를 맺으며 푸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푸른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남광주시장을 모델로 한 곽재구 시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문화는 결국 괴롭고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의 밑불에 한 줌의 톱밥을 던져주는 일이 아닐까?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미디어본부장

성새별 기자 seong2067@gmail.com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성새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