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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석탑부터 5·18 시민군 기념비까지

기사승인 2022.08.26  16: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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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광주공원’

1913년 일제 강점기 시절에 만들어진 광주공원, 광주에서 맨 처음 조성된 광주광역시 제1호 공원이다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도시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공원이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 복판 종로에는 1897년 영국인 J. M. 브라운이 조성한 서울 최초의 공원 ‘탑골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때 흥복사, 조선시대에 와서는 ‘원각사’라 불렀던 절이 있었다.

한때 ‘파고다공원’으로 불렸던 탑골공원은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12m가 넘는 커다란 유리 보호각에 갇혀 있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인천에는 1888년에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만국공원(인천 자유공원)’이 있다. 1944년 조성된 부산 ‘용두산공원’의 부산타워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부산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대구 중구에 있는 ‘달성공원’은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로 4m 높이의 토성이 1.3km가량 이어지며 공원을 감싸 안고 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으로 1970년 동물원이 생기면서 대구의 대표적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흙으로 쌓은 ‘달성(達城)’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광주공원 현충탑. 일본 신사를 허물고 이 자리에 현충탑을 세웠다. 6·25를 상징하는 6각 기둥에 높이 25m의 웅장한 현충탑으로 광주공원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탄생한 광주 제1호 공원 ‘광주공원’

한 도시의 정체성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성립한다. 광주광역시에도 ‘민주·인권·평화’라는 도시의 가치와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오래된 공원이 있다.

빛고을 ‘광주(光之州)’라는 이름을 처음 얻게 된 고려 시대부터 1980년 현대사의 큰 아픔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을 관통하며 광주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원이 있다. 광주천변에 자리한 광주광역시 제1호 공원 ‘광주공원’이다. 여름이 서서히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는 지난 주말 광주공원을 찾았다.

무등산 장불재 아래 샘골에서 발원한 광주천은 광주를 동·서로 길게 휘감아 돌며 영산강으로 향한다. 물줄기는 도심에 이르러 남구 구동과 동구 금남로와 충장로를 연결해주는 광주중앙교를 통과한다. 속칭 ‘공원다리’라고 불렀던 이 다리를 건너면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을 만나게 된다.

1971년에 지어진 시민회관

광주에서 살고 있는 중년 이상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광주공원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학창 시절 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에서 반공 영화를 단체로 관람하기도 했고 웅변대회나 궐기대회 등 각종 관제 행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할 것이다.

청춘 시절엔 공원 앞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우정을 쌓기도 했고, 휴일이 되면 연인들은 공원 광장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며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그 많던 비둘기들과 그때 그 연인들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광주에서 맨 처음 조성된 광주공원은 이러한 소소한 일상의 추억뿐만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5·18까지 광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의미 깊은 공간이기도 하다.

여름이 서서히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는 지난 주말, 광주공원을 찾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기나 바둑을 두며 소일하고 있다

‘광주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광주공원’은 아이러니하게도 1913년 일제 강점기 때 탄생한 공원이다. 처음부터 광주공원이 아니었다. 구강공원, 탑산공원, 구동공원이라고 불리다가 해방 후 ‘광주공원’이 되었다.

광주공원이 있던 자리는 원래 성거산(聖居山) 또는 성구강이라 불렀던 조그만 언덕 형태의 산이었다. 성구강(聖龜岡)이란 ‘성스러운 거북이가 사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산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동네 이름이 ‘구동(龜洞)’이다.

먼 옛날부터 광주 사람들은 동쪽의 무등산과 함께 커다란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서쪽의 성거산을 ‘성소(聖所)’로 삼고 살았다. 상서로운 거북이가 광주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109호로 지정된 ‘성거사지 5층 석탑’. 수호신 거북을 지키기 위해 거북의 목부분에 세운 고려 전기의 명품 석탑이다

고려시대 광주 사람들은 거북이가 광주를 떠나 버린다면 광주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거라 판단하고 거북이를 지킬 묘안을 짜냈다. 거북의 등에 ‘성거사’라는 절을 짓고 거북의 목 부분에 무거운 5층 석탑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 절은 사라지고 5층 석탑만 남아 있다. 대한민국 보물 제109호로 지정된 ‘성거사지 5층 석탑’이다.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탑신과 옥개석의 줄어드는 비율이 완만해 안정감과 수려함이 빼어난 고려 전기의 명품 석탑이다.

평화롭던 광주의 성소는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망가지기 시작했다. 일제가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던 강점기 시절, 일본은 식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곳곳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그들의 왕을 위해 목숨 바친 전몰자들을 기리는 추모탑을 세웠다.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1909년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때 체포된 의병장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심남일 의병장이다 ⓒ광주역사민속 박물관

1913년 일제는 성거산 정상을 깎아내고 신사를 세웠다. 신사를 성역화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공수해온 벚나무와 일본산 나무를 심었다. 우리 토종 나무들은 베어지고 향토 수종은 씨가 말라 버렸다. 거북의 머리 부분에 그들의 전몰자를 위한 추모탑을 세우고 공원 입구에서부터 신사에 이르는 길에 계단을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광주에 최초의 공원이 탄생했지만 광주의 수호신 거북은 머리가 깨지고 등이 파헤쳐지고 발이 끊어지는 아픔과 함께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일제의 신사는 무너지고 우리의 현충탑이 우뚝

이렇게 조성된 광주 공원은 일본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벚꽃이 피면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은 일본 여인들로 붐볐다. 매년 4월과 10월에 춘추 대제를 지내며 그들만의 축제를 즐겼다.

광주공원 선정비군.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를 지낸 권율 장군의 창의비를 비롯해 27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 관리들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참배를 거부한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며 탄압했다. 이를 바라보는 광주 사람들의 시선은 몹시 불편했고 원한이 깊었다. 자연스럽게 광주공원은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었다. 사람들은 제일 먼저 광주공원의 정상에 있는 일본 신사와 추모탑을 무너뜨린다. 치욕스러웠던 역사의 흔적들을 지워 나가기 시작한다.

신사가 무너진 자리에 1963년 한국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경찰과 전몰호국 용사들을 기리는 ‘우리 위한 영의 탑’을 세웠다. 그 뒤 2015년에 6·25를 상징하는 6각 기둥에 높이 25m의 웅장한 현충탑을 다시 세웠다.

사적비군 한쪽 구석에 친일파 3인방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의 비석이 뽑힌 채 누워있고 그 앞에 이들의 친일 행각을 담은 단죄문이 서있다

탑신 맨 위쪽에 새겨진 무궁화는 후손들이 영령들께 바치는 감사의 헌화를 의미한다. 탑신 상단 4개의 스테인리스 거울은 조국을 밝히는 빛으로 영령들의 혼을 상징한다. 현충탑은 광주공원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충탑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와 시문학파의 창시자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쌍둥이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의병장 심남일(1871~1910)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나주, 남평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때 체포되어 1910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다.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 시인은 1920~ 30년대 남도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이다.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시문학>를 창간했다. 쌍둥이 시비는 보기 드문 사례다. 우정의 상징인양 두 시인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에는 용아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영랑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다.

시문학파의 창시자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쌍둥이 시비’. 쌍둥이 시비는 매우 희귀한 사례다

현충탑에서 광주 향교 쪽으로 내려가면 여러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비군을 보게 된다. 과거 광주에서 주요 관직을 지낸 인물들의 공적을 기린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광주공원 사적비군’이다.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를 지낸 권율 장군의 창의비를 비롯해 27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한쪽 구석에 3개의 비석이 넘어진 채로 누워있고 그 앞에 단죄문이 서있다. 친일파 3인방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의 비석이다. 이들은 전라남도 관찰사와 광주 목사를 지내면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던 자들로 일본인들이 광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일파 들이다.

광주시에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친일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이들의 비석을 무너뜨리고 단죄문을 세워 후손들에게 ‘광주다움’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광주 4·19 의거 추모비

4·19 문화원

현충탑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광주 4·19 의거 추모비’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의 동상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의거 2주년이 되는 1962년 당시 목숨을 잃은 열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조지훈 시인의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라고 시작되는 헌시가 새겨져 있다.

1980년 5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 광주를 관통하며 지나간다. 광주공원에도 그날의 흔적들이 있다. 광주공원 입구 해태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5·18 사적지 표지석이 있다. 광주공원은 5·18 당시 시민군들이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했던 곳이다.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자위의 수단으로 무기를 들게 되었고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아 이곳에서 훈련을 했다. 해태상 뒤에 시민군의 상징이 된 무명 열사 ‘김군’ 동상과 안내판이 서 있다.

공원 입구 해태상 뒤에 시민군의 상징이 된 무명 열사 ‘김군’ 동상과 표지석이 서 있다.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한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품이다

광주공원은 5·18 당시 시민군들이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했던 곳이다. 5·18 사적지로 지정됐다 ⓒ 5.18 기록관

김군 동상은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한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품이다. 평화를 상징하는 새와 시민들이 헌화하는 의미로 옷 위에 이름 모를 꽃들을 새겨 놓았다. 불의한 국가 폭력에 맞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산화한 시민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렇듯 광주공원은 고려시대 석탑부터 5·18 시민군 기념비까지 시대를 관통하며 ‘광주의 정신’과 ‘광주다움’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지켜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미래를 위한 교육장이다.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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