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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효열 정려에서 사라진 것은

기사승인 2022.07.01  10: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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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판과 정려 판각 문은 어디에 있나요

오효열 정려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4-1에는 오효열 정려(五孝㤠旌閭)가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서 있고 그 안에는 노모와 두 아들의 부부, 그리고 시집간 딸이 한날한시에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가 있다.

“정유왜란(1597) 때에 왜적이 전라도를 수륙(水陸)으로 침공해 오니, 당대 사림의 영도자로 추앙받았으며 언변 가이던 성균 진사 서산인(瑞山人) 유영(柳瑛)은 부친인 종성 부사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3자 은진 현감 유형진과 모친인 좌찬성 금양 군 오겸의 따님 나주 오 씨 부인을 비롯한 전가족과 함께 삼향 별업으로 피난 가려고 나주 동강에 이르러 도강 차 다른 많은 사람들과 배를 기다리고 있던 중 왜적들의 기습을 당하여 남녀노소가 모두 놀라 분산되었다. 유영과 유현 형제는 부친의 소재마저 못 찾고 모친 나주 오 씨 부인만을 업고 방황하다 날은 밝아지고 역진(力盡)하여 더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모친은 위기를 피하기 어려움을 알고 아들 형제에게 ‘살아서 선사(先祀)를 받들라’ 하며 탈출을 권하였지만 울며 답하지 아니하고 모친 보호만을 하였다. 뒤이어 많은 왜적들이 쳐 들어와 먼저 모친을 위해하려고 하자 공(公) 형제는 크게 소리쳐 꾸짖으며 모친을 안고 대항했지만 마침내 모자는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유영의 처 고흥 유 씨, 유현의 처 낙안 오 씨, 매(妹) 정성일의 처 서산 유 씨 등은 각기 근처에 숨어있다가 그 분통하고 처참한 상황을 보고 뛰쳐나와 왜적에게 소리쳐 꾸짖으며 모친과 그 형제들의 시신을 안고 슬퍼했으나 역시 모두 무참이 살해 당하였다. 유영 형제의 죽음은 효의 극치로서 영원히 불멸의 모범이 될 것이며, 고흥 유 씨 부인, 낙안 오 씨 부인, 서산 유 씨 부인의 죽음도 효열의 정화로서 후세의 귀감인 것이다. 전란이 평정된 후 기해(1599)년에 나주 목사 조수준이 왕(선조)에게 주청 하여 을묘(1615)년에 예조에서 정려(旌閭)를 내렸고 인조 2년(1624)에 현 위치에 나주목에서 정문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 침략 후 1920년 경에 왜 헌병들이 이 정문에 걸렸던 정려 판각 문과 현판을 강탈해 버림으로써 거룩한 항일정신과 그 사적 및 고귀한 효열의 상징을 유린(有躪)한 바 있었다” 위의 내용은 정려 앞 좌측에 세워진 석비에 기록되어 있다.

순천대 명예교수인 조원래에 의하면, 1597년 2월 21일에 발한 작전명령서(朱印狀)에 ‘전라도를 남김없이 모두 쳐 부순 다음 충청도와 그 밖의 지역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대로 공략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에 따라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보복 전쟁이면서, 이번에는 조선의 남부지역만이라도 자국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전략 하에 시작되었다. 전군(全軍)을 좌, 우 양군과 수군으로 나눈 다음 우군 6만여 명은 모리 데루모토 지휘 하에 양산, 거창, 함양을 거쳐 전주를 향해 쳐들어가게 하고, 좌군 5만여 명은 우키다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하여 수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해상으로 진격한 뒤 남원성을 공취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3군이 합세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를 모두 장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을 격파시킨 뒤 수륙 양면으로 호남 침공을 향한 전면 공세를 취하였다. 수군은 광양의 두치진에 상륙, 사천, 하동을 거쳐온 좌군의 주력과 합세한 후 구례, 남원을 향해 진격하고 우군은 호남과 영남 사이 요충의 하나인 황석산성을 공파한 뒤 육십령을 넘고 진안을 거쳐 전주로 북상하였다. 9월 중순부터 장성, 나주, 영암, 해남 등지의 전라우도 열읍을 점령, 초토화하고 닥치는 대로 주민을 살육하였다. 따라서 이후 침략군은 호남 전역에 바둑판처럼 깔려 포진하였으니 당시의 점령군이 50여 개의 부대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호남 전역을 점령했던 일본군의 잔학상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는데, 조선인이라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절단하여 히데요시에게 바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부녀자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죽이고 코를 베어 바쳤다. 그 수효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참전 장수들의 전공평가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9월 26일 진원과 영광에서는 무려 10,040개의 코를 잘라 바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재 일본의 교토시 동산구에 있는 비총(鼻塚)은 정유재란 시 희생된 약 10여만 명의 코와 귀가 묻힌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까지 끌려갔던 강항(姜沆)이 전라 우수영 관내 무안현 낙두 마을의 광경을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무수한 적선들이 항구에 가득 차 있어 홍백기가 햇빛에 번쩍거리는데, 우리나라 남녀들이 서로 뒤섞여 해변 양쪽에 쌓인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울부짖는 곡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바닷물도 오열하는 듯했다”라고 하였다. 이 시기의 호남 지방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을 정도로 심각했다. 담양 추월산 정상 부근 바위 절벽에서 김덕령 의병장 부인인 흥양이 씨가 왜군에 쫓기다 뛰어내리고, 함평에 사는 문중의 부녀자들이 왜적을 피해 묵방포까지 왔다가 포로로 잡히자 칠산 앞바다에 모두 몸을 던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진의 밤재 싸움과 병치 혈전 고흥의 첨산 전투와 보성의 안치 혈전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의 정예부대와 처절하게 싸우다 모두가 순절한 의병 항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호남 지방 곳곳에 의병 항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판과 판각문이 없는 정려

왜적의 기습을 받아 모친을 업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유영, 유현 형제와 가족은 결국 적의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다. 연약한 모친을 업고 피하기에는 너무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아들이라도 탈출하기를 원하는 모친의 간곡한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족은 모두 죽음을 맞았고, 그들의 코는 베어졌을 것이며, 소금에 절여 적의 본국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오효열 정려는 일제 강점기 시절 다시 한번 수난을 당한다. 1920년 경 왜적의 헌병들이 이 정려에 걸렸던 정려 판각 문(旌閭板刻問)과 현판(懸板)을 강제로 탈취하여 없애버린 것이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죽이고 코와 귀를 잘라간 그들의 부끄러운 기록을 감추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서산 유 씨 문중은 현판과 판각 문을 복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석비를 세우고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아주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효자도 단기간에 속성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공경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효가 스며들어 꽉 들어차게 되는 것이다. 효자의 집안에서 효자가 나온다는 것이 고금(古今)의 진리이다. 유영과 유현 형제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생명의 위험 속에서 펼쳐진 부모에 대한 효와 열의 진수를 본다. 오효열 정려에서 현판과 판각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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