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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 비각을 가다

기사승인 2022.01.24  09: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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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집에서 차마 들을 수 없었던 울음

평택임씨 정려비각 전경

나주의 구족인 임 씨의 자손이 행장(行狀 죽은 뒤에 행적을 기록한 글)을 가지고 와서 나주 목사인 나에게 고하기를 “임상경의 형수 광산 김 씨가 정절로 해서 정려(旌閭 정문)로 포상받은 특별한 은전을 입어 이제 다 지어졌으니 바라건대 한 말씀 내려 주셔서 포상하신 칙령이 더욱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급히 자리를 당기고 앉아 그 행적을 물었더니 상경이 슬퍼하며 대답하기를 “김 씨는 현록의 따님입니다. 시집온 지 한 달 만에 과부가 되어 상중(喪中) 결발(結髮)을 하고 서럽게 곡을 하니 이웃집에서 차마 들을 수 없었답니다. 한 번은 남편의 혼백을 모셔놓은 영우 곁에서 목을 매었는데 급히 제지하여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 뒤 시부모께서는 남편 따라 죽겠다는 김 씨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그 뜻을 누그려 뜨리기 위해 친정 부모에게 보냈습니다. 친정에 돌아와 있던 어느 날 김 씨는 부모가 집에 없는 것을 알고 대울타리 틈으로 빠져나와 기어이 앞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임자년 8월 초 7일 김씨의 나이 겨우 19세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공경하는 마음이 솟구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무릇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것은 대장부도 어려운 바이거늘, 김 씨는 일개 부녀자의 몸으로 학문에 지극한 공을 들인 것도 아니고, 의리에 대한 강론에 익숙한 것도 아닌데 남편을 잃자 순절할 것을 결심했으니, 어린 나이에 그 마음가짐이 진실로 의연하여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었으리라. 강물을 바라보며 기꺼이 몸을 던져 함께 묻히고자 하는 뜻을 이루었으니 어찌 그리도 열열(烈烈)했던 고. 대저 임 씨의 선조 중에는 3세에 걸친 충효와 2세에 걸친 절행이 있었는데 백여 년 후에 김 씨가 그 가문에 들어가서 행한 바가 이처럼 두드러지니 가히 남편 집안의 선대 미덕을 능히 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도다 향리에서의 칭송 여론이 읍과 감영으로부터 위로는 조정에까지 미치면서 갈수록 넓어지고 더욱 멀리 퍼져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아아, 검은 지붕과 붉은 기둥의 정려(旌閭)가 세워져 이미 도로에서 빛나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감탄하여 고개를 수그리리라 – 고종 원년 갑자(서기 1864) 10월 은진 송정희 씀

정려 비각 내부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산동 459-4에 있는 ‘평택 임 씨 정려 비각’에는 이처럼 가슴이 먹먹하도록 슬픈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선 왕조는 삼강과 오륜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교화를 위하여 충신, 효자, 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는데, 그 대상자는 그 집의 요역을 면제하게 하였으며 또 일부 사람들은 그 행적에 따라 벼슬을 내리거나 땅을 하사하였다. 가문의 명예였으며 공,사천의 경우 면천하여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실제 생활에 이익을 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의 혼인과 여성의 지위를 살펴보면 부모의 유산을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 호적 관련 문서들이 출생 순서와 상관없이 남성을 먼저 기재하고 여성을 그 뒤에 기재한 것과 차이가 있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의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을 호주로 기재할 수 있었다. 남성 중심의 유교 질서에 여성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존재가 됐던 조선 사회는 과부가 되어도 재혼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제도를 두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원래 양반에게만 적용되던 재가 금지가 점차 평민이나 천민들 까지도 재가를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별한 여인은 무조건 수절을 해야 되는 것으로 강요되었다. 여자들은 기초 소양만 배우게 하고 10대 후반쯤 혼인을 하고 남자들은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는 조혼이 일반적이었다.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의 여성 대우는 국제적으로 최악이기로 유명하다. 여성 인권은 말 그대로 가축을 대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자르는가 하면, 단지 남성과 통화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개 장소에서 채찍을 40대까지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평택임씨 삼강 유허비

김 씨의 나이 겨우 19세인 어린 신부는 10대 초반의 더 어린 남편을 만나 미처 사랑을 싹 틔워 볼 겨를이 없이 과부가 되었다. 이제 평생을 홀로 살아가야 할 그 녀 앞에 놓인 두려움과 막막한 절망을 누가 어루만져줄 수 있겠는가? 사회가 혼란할수록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에게 더 가혹한 억압과 굴레를 강요해왔다. 학문에 공을 들인 것도 아니고 의리에 대한 강론에 익숙한 것도 아닌 김 씨의 죽음을 당시에는 남편에 대한 절의로 해석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눈에는 재가의 금지라는 악습의 희생자로 여겨진다. 부르카를 뒤집어쓴 채 채찍을 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탈레반 치하의 여성과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이웃집에서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서럽게 곡을 하는 조선 여인이 서로 겹쳐 보인다. 특권과 반칙이 난무하던 조선은 내부에서 붕괴되고 있었다. 서럽게 곡을 하는 여인이 조선 천지에 어디 한 두 명이었을까? 김 씨가 죽은 후 30년 후에 갑오개혁을 통하여 남성들의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였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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