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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 있는 인간 어디 없나

기사승인 2022.01.19  17: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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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열 대동문화재단 대표

지도층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이다.

<논어>에 공자와 제자 자공의 문답이다. 자공이 백성을 위한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식량이 족하고(경제력), 군대가 충족되고(군사력),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 “스승님!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그중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사력을 버려야지”, “그래도 둘 중에서 또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경제력이지. 자고로 백성들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국가는 존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 지도자에게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뢰’란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불타는 신념과 냉철한 확집(確執)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이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뢰를 위한 중요 요소였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1960년에 발표한 <지조론>에서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다”며, 믿음은 ‘지조’에서 비롯함을 강조했다. 당시 시국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지훈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해방 후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한 반성은 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정치 기득권을 잡고 있으며, 심지어 지조 있는 많은 식자들마저 거리낌 없이 변절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조론이 발표된 지 두 세대가 지났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혼돈’이다. 특히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등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층 대부분들에게 나라와 국민의 공익을 위한 원칙과 공정, 상식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신념과 지조를 버린 채 오직 개인의 명리만을 좇아가는 소인배들만이 득실거린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지조를 지키며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거나 꼰대로 여겨 백안시(白眼視)한다. 이런 세상에 지조를 말하는 것 자체가 시류와 부합하지 못한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옛사람들은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가했다. 바로 ‘신독(愼獨)’이다.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후대의 평가가 여하할까를 두려워하며 살았다. 때문에 일거수일투족, 언행을 신중하게 처신했다. <채근담>에 ‘도리를 지키며 사는 자는 한때 적막하지만 의롭고, 권세에 아부하는 자는 잠시 화려하지만, 만고에 처량하다.’라는 말이 있다. 울림을 주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끝내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한순간에 훼절하여 패가망신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요즘 사람들은 평생의 신념, 양심 따위는 가볍게 바꾸거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이런저런 권력과 손을 잡고 일명 갈아타기를 손바닥 뒤집듯 한다. 국민을 우롱하듯 괴변으로 유세(遊說)를 한다. 국민과 역사의 매서운 심판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3월 대선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국민들에게 매우 중차대한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대선후보의 인물됨이나 양당의 전략을 살펴보면 우선 당선만 되고 보자는 식으로 민족과 국가의 장래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국가 미래를 이끌어갈 최고의 지도자로 가장 훌륭한 최선의 후보를 뽑아야 하거늘, 후보 중에 차선은 고사하고 최악이라도 피해 차악(次惡)을 뽑아야 한다는 현실이 답답할 따름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 충절의 최고 인물을 이야기할 때면 포은 정몽주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포은은 조선 개국을 앞둔 고려 말의 극도로 혼란한 시국에서 두문동 72현과 더불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지조의 선비였다. 이성계 일파의 창업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충절은 조선 창업 후 신원(伸寃)되어 조선 500년을 지나 오늘날에 이르도록 태산북두처럼 빛이 나는 충절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남도 땅 담양에 가면 독수정(獨守亭)이란 정자가 있다. 무등산이 품고 있는 정자 문화권의 정자 중에 이곳이 담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은 매우 크다. 독수정 창건주는 고려 말 병부상서를 역임했던 서은 전신민(全新民)이다. 전신민은 고려가 멸망하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고 낙남(落南)하여 무등산 자락인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홀로 지킨다는 뜻의 ‘독수’는 이백(李白)의 시 ‘백이숙제는 어떤 사람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라는 글에서 비롯한다. 중국 고대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에 대한 지조를 지키다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절의파로 후대 올곧은 선비들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전신민의 호 서은(瑞隱)은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의 다른 이름)에 숨었다는 뜻이다. 정몽주와 절친이었던 전신민이 백이숙제의 절개를 닮고자 했던 뜻을 짐작 할만하다. 그는 독수정을 북향으로 짓고, 개성의 고려 왕조를 향하여 날마다 북향 4배를 올리곤 했다고 한다. 독수정 이름 속에는 전신민의 고려에 대한 충절과 기개 높은 사대부들의 철학과 인문 정신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 곧 범부(凡夫)들이 초지일관의 삶을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세상이다. 서머싯 몸이 ‘인간의 속성은 일관성이 없다’고 했던가. 한눈을 팔지 않고 지조와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현실은 고달프고 힘겹다. 그런 까닭에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의 그윽한 초절(超絶)이 오래도록 향기로운 것일 게다.

조상열 발행인 ddmh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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