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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커피를 사랑했던 ‘가을의 시인’

기사승인 2021.11.02  17: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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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다형 김현승 시인의 흔적을 찾아서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가을의 기도> 시비

가을에는
기도 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다형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전문. 문학예술 1956)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아무리 문학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도 가을이 되면 한 번쯤 읊조리게 되는 시들이 있다.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도 그런 시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자 결핍의 계절이다. 꽉 차있는 듯 하지만 한편으론 텅 비어 가는 상실의 계절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신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하는 계절이다.

커피를 좋아했던 형, 다형 김현승(茶兄 金顯承 1913~1975) 시인 ⓒ 다형 기념사업회

가을과 커피를 좋아했던 '고독의 시인'

커피와 차를 좋아했던 형. 다형 김현승(茶兄 金顯承 1913~1975) 시인 하면 ‘가을’ 그리고 ‘고독과 커피’가 연관 검색어처럼 자동으로 떠오른다. 가을을 유달리 사랑한 다형은 <가을의 기도>를 비롯하여 <가을이 오는 시간> <가을의 입상> <가을의 시 > <가을의 소묘> <가을 비> <가을의 향기>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을 시편들을 남겼다.

"사람은 여름과 겨울에 늙고, 봄과 가을에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봄에는 육체적으로, 가을에는 영혼이 성장한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라고 했던 다형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제주를 거쳐 일곱 살 되던 1919년에 광주로 온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인 광주 숭일학교를 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낸다. 이때 그의 집에서 기숙했던 선교사들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레 커피를 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의 커피 사랑은 평생을 이어간다. 다형이 살았던 양림동 길 모퉁이에는 그를 기리는 조그만 다방이 하나 있다. 양림동의 핫 플래이스 '다형다방'이다

광주 양림동에 있는 다형 다방

광주에서 숭일학교를 마친 소년 김현승은 다시 평양으로 올라가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이때 양주동 교수와 이효석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시작에 몰두한다. 숭실전문학교 3학년이 되던 1934년 만 21살 때 쓴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 교수의 추천을 받아 동아일보에 실리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광주가 사랑하고 광주를 사랑했던 시인

그로부터 2년 후 1936년. 졸업을 목전에 앞두고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돼 부모님이 계신 광주로 내려온다. 다형은 평양에 유학하던 시절에도 늘 광주를 그리워했다. “나의 고향은 따스운 전라도의 남쪽 광주이다. 이 광주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양림동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광주 사랑은 남달랐다. 그의 펜은 늘 광주를 향하고 있었다.

다형 김현승의 가족 사진  ⓒ 다형 시선

광주로 내려온 다형은 그의 모교인 숭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인지 ‘조선시단’을 통한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며 문단의 유망주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광기가 극에 달하던 1938년. 다형은 돌연 붓을 꺾는다. 신사참배 거부로 교사직을 물러나게 되고 함께 투옥됐던 누이동생 마저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게 되자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절필을 선언한다.

1946년 해방이 되고 숭일중학교 교감에 취임하면서 8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51년에는 조선대학교 문리과대학 부교수로 취임하면서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문단에 광주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동인지 <신문학>을 창간한다.

교수 시절 강의하는 다형 김현승 시인 ⓒ 다형 시선

1960년에 숭실대학교 부교수가 된다. 조선대학교에서 문리과대학 학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사양하고 강사로 3년 동안 출강한다. 다형은 조선대와 숭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한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문병란·손광은·윤삼하·문순태·박성룡·박봉우·이성부·조태일 등 30 여 명이 넘는다.

1972년 숭전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에 취임하였고 1975년 예배 시간에 기도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별세한다. 시인의 나이 62세였다. <김현승시초>(1957),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고독>(1970), <김현승 전시집>(1974) 등 5권의 시집을 펴내며 약 3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다형 탄생 100 주년을 맞아 다형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절대고독> 시비. 호남신학대학교 정문 아래에 있다

사직공원에 있는 책 모양의 다형 시비 <눈물>이 새겨져 있다

광주가 사랑하고 광주를 사랑 했던 시인 다형 김현승. 그의 고향 따스운 전라도의 남쪽 광주에는 그를 기리는 4개의 시비가 서 있다.

양림동 언덕에 있는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에 그의 대표 시 <가을의 기도> 시비가 있고 교정을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다형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시비에 다형의 사진과 함께 <절대고독>이 새겨져 있다.

양림동 근처 사직공원 전망대 아래에도 책 모양의 시비가 있다. 다형이 소년 시절 시심을 키우며 늘상 바라봤던 무등산 기슭에는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4살 어린 아들을 잃고 애통해하면서 눈물로 쓴 시 <눈물>이 시비로 서있다.

무등상 원효사 기슭에 세워져 있는 다형의 시비.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4살 어린 아들을 잃고 애통해하면서 눈물로 쓴 시 <눈물>이 서예가 장전 하남호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다형 김현승의 ‘눈물’ 전문. 김현승 시초 1957)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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